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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제목에 관한 콤플렉스 (어느 저자의 경우)
    책 이야기 2013. 8. 7. 09:32

    다음은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한윤형 저자님이 기획회의 344호 '여는 글'로 쓰신 글입니다. 편집자에게 살짝 보라고 보내주셨는데, 너무 재미나서 어크로스 블로그에도 공개합니다. 


    책 제목에 관한 콤플렉스


    어쩌다보니 본인이 쓴 책이 많이 팔려야 형편이 나아지는 작가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본시 나는 ‘센스 있는 제목’을 잘 떠올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콤플렉스를 느끼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내 글쓰기 이력은 인터넷의 정치토론 게시판과 블로그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시기 내 글쓰기의 목적은 단순히 ‘조회수’가 아니라 ‘이해하는 사람의 숫자’에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게시판에서 ‘제목 낚시’를 하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이 내 글을 보기를 기다리는 그런 이였다. 왜냐하면 ‘제목 낚시’를 클릭하는 이들의 경우 글 내용을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희망돼지’라는 조어는 좀 더 의미를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 ‘국민모금’이란 표현으로 바꾸었으며, (‘희망돼지’라 쓸 경우 노란 돼지 저금통에 들어간 돈만 헤아려야 할 것 같은 착시현상이 들지만, 2002년의 노무현 후보의 대선자금 모금의 범위는 사실 ARS 후원과 신용카드 후원까지 합쳐서 생각해야 한다) 센스 있기로 유명한 모 논객이 “춤추는 대선수사”와 같은 멋드러진 제목의 글을 쓸 때도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다.


    블로그로 글쓰기의 주무대를 옮긴 후에도 그러한 경향성은 이어졌다. 그 시기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소위 정치평론가라는 이들이 ‘검색어 낚시’를 하기 위해 자신의 글 내용에 관계도 없는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주로 연예인의 이름이었다)를 끼워 넣는 행태였다. 돌이켜보면 ‘구글 에드센스’의 조회수 광고료가 활성화된 시대였던 거다. 하지만 정치평론이나 인문도서 리뷰를 해서는 ‘구글 에드센스’를 달아봤자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같은 링크나 올라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블로그 시절에도 나는 차라리 "…와 …의 문제"라는 형식의 건조한 글 제목을 선호했다. 2007년 당시에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들춰보면 “<디 워>의 흥행과 정치적 소비의 문제”, “사회복무제 도입과 군가산점제의 문제”, “FTA 체결과 민주적 리더십의 문제”, “정치적 설득과 매혹의 문제” 따위의 제목을 달고 있다.


    물론 본인이 고지식한 사람이라 여겼던 마음편한 시절은 책을 출판하게 되면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출판계와 출판시장은 젊은 필자에게 ‘재기발랄한 제목’에 대한 ‘센스’를 요구했고 그것은 나 자신이 애초부터 가지지 않았고 계발하려는 생각도 없었던 것이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텍스트, 2009)란 첫 책의 제목이 적절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제목은 블로그에서 제목 공모를 하여 받은 덧글 중에 개중 나아보이는 것을 고른 것이었다. 스스로 지은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라는 두 번째 책의 제목은 살짝 후회가 된다. 이 책은 ‘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한 진지하고 분석적인 비평을 담은 것이건만 제목에서는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의 ‘실패’는 저자로 하여금 센스가 없는 이가 센스가 있는 척을 해봤자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라는 감상을 가지게 했다. 


    세 번째 단독저서인 <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 2010)의 경우 청년필자의 발랄한 글을 기대했던 출판사의 바람을 저자가 정면으로 배반한 경우다. 원고지 2200매 분량이 넘는 육중한 원고에 난감함을 느낀 출판사는 되도록 가벼워 보이는 표지를 만들면서 제목이라도 “거짓말은 아침에 배달된다” 정도로 가져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다고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되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고 저 제목에 관심가질 그 소수의 독자들에게 2200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히고 싶어 했다. 


    적은 판매량은 예상대로였지만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거나 관심을 가진 이들이 저 2200매를 다 읽고 저자가 원하는 만큼의 자기성찰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실 이 책은 ‘안티조선 운동’의 맥락을 넘어 이것을 깔대기로 하여 2천년대 진보담론을 성찰하는 측면이 있었으나 제목 때문에 읽지 않은 이들에게 그저 그 운동 참여자의 자화자찬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예전보다도 더 ‘제목’ 문제에 있어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게 되었다. 공저인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웅진지식하우스, 2011)이나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체>(메디치미디어, 2011)는 물론 최근의 단독저서인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 2012)도 저자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다.  


    ‘글쟁이’라는 정체성은 ‘내 글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고 그 사람의 숫자는 다다익선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얼마나 읽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로 살기 위한 물질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선 ‘내 글을 돈 주고 사서 읽을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의 숫자는 다다익선이다. 읽는 이들이 내 글을 이해했는지 여부는 부차적인데다가 어떤 경우엔 귀찮은 일이기도 하다. 단지 작가의 입장에서만 말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내 책을 산 후 읽지 않고 버려두는 것이 최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책 제목에 대한 고민은 결국 ‘글쟁이’란 정체성과 ‘작가’로 살기 위한 물질적 기반 사이의 긴장관계다. 글쓰기가 혼자만의 일이라면 ‘글쟁이’의 정체성에 의거한 고민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책이라는 산물은 여러 사람의 노동과 협업을 통해 나오는 것이기에 작가 혼자 잘난 척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실 ‘이해하는 사람의 숫자’와 ‘구매하는 사람의 숫자’가 반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여러 사람이 접하게 될 때에 한정된 독자층을 넘어 지금까지 나를 몰랐던 더 많은 독자들이 저자를 이해하게 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잘 지어진 제목과 잘 빠진 책 디자인이 독자의 범위를 넓혀줄 때 느끼는 쾌감은 작가에게 가장 강렬하게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콤플렉스와 긴장관계를 넘어 그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모두들 책 제목에 골머리를 싸매는 것일 게다. 


    수줍게 하나 고백하자면 요즘 약간의 쾌락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그 쾌락의 시절이 요즘 가고 있군요. ㅜㅜ

     

    방학을 맞은 대학생 독자님들~ 전국의 서점에서 이 책을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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