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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쯤 이 일에 익숙해질까 [CSI in 모던 타임스] 편집 후기편집자가 쓰는 책 뒷담화 2013. 7. 1. 17:13
이 일이 가진 피고용자적 불안은 바로 이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고서야 어디서 실수가 날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는 점. 마감날이면 내 오른쪽 어깨 뒤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하다.
‘너는 반드시 실수를 할 것이다.’
그러다 정말 실수가 나서 종이를 다시 발주하고, 필름을 다시 뽑고, 협력업체 분들의 뒷모습에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하고 있노라면, 이렇게 읊조릴 수밖에 없다.
‘이 일은 도대체가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이번 책에서는 내가 책 그램 수에 욕심을 부리다 사고가 났다. 장장 416페이지에 이르는 책인데, 70그램과 80그램 종이 중에 80그램을 택했다. 이 책은 뉴욕 재즈 시대 화학 범죄 연대기를 다룬 책으로, 모두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읽힌다. 그래서 일부러 소설에 잘 쓰는 종이를 택했는데, 이 종이의 70그램과 80그램이 개인적으로 느끼는 질감의 호불호가 있었다. 80그램을 쓰면 책이 더 두꺼워지겠지만, 워낙 흡입력도 높고 속도감도 좋은 원고라 독자 분들이 부담감 없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봤자 5mm 차이였다. 이 5mm가 마감날 나의 저녁을 부산스럽게 만들 게 될 거라는 걸 자부심이 끓어 넘치던 그때에는 몰랐다.
표지 인쇄에 흔히 쓰는 종이에는 표지가 세 벌이 찍혀 나오는데, 그 종이에 세 벌을 찍기에는 [CSI in 모던 타임스]는 2mm가 더 길었다. 나를 대신해 대표님과 출력실 담당자 분이 일을 해결하실 때, 인쇄소 분께 그래도 어떻게든 내일 감리는 볼 수 있겠느냐고 여쭐 때 나는 얄팍한 고민에 빠졌다.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척을 해야 하나? 하지만 원숭이는 개뿔. 결국 같은 고백으로 마무리했다.
"이 일은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아요."
어쩌다가 편집자분들을 만나면 이런 실수담을 나누게 된다. 그건 실상, 편집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덜 부끄러운 실수, 이 일의 가장 덜 고단한 면이기 때문이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이 더운 날 편집자 분들 모두모두 힘내시길.
** 아무튼 책은 다행히 멀끔하게 나왔다. 재밌는 책이다. 올 여름, 휴가를 길게 쓰지 못하고 하루 이틀 찔끔찔끔 쓸 수 있을 때, 그래도 허투루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때, 하반기부터는 좀 더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마중물로 삼기 좋은 책이다. 노리스와 게틀러라는 두 법의학자가 사건 기록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읽노라면, 그 오른쪽 어깨 뒤에서는 이런 익숙한 말이 들릴지도. ‘역시 언제나 현실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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